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시편 23:1-6)

2012. 3. 7. 17:35말씀과삶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시편 23:1-6)


    어느 유명한 인사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마침 유명한 배우가 참석하게 되어 사람들이 그에게 멋진 솜씨를 보여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시편23편을 낭낭한 목소리로 멋지게 낭송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훌륭한 솜씨에 감탄하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목사님께 한마디 해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목사님도 시편23편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목소리는 그리 좋지 못했고 또 멋지게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암송이 모두 끝났을 때에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배우는 목사님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시편23편을 알고 있을 뿐인데 목사님은 그 안에 계신 목자를 알고 계시는군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라고 믿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23편은 다윗만의 시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시편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고백해야 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사업에 실패한 한 젊은 사업가가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사업에 실패하고, 삶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은 그에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시편 23편을 아침에 10번, 점심에 10번, 저녁에 10번 읽으시오.”

    이 젊은이는 그 처방대로 시편 23편을 아침에 10번, 점심에 10번, 저녁에 10번 읽었습니다. 3년쯤 지난 어느 날, 한 성공한 사업가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알아보지 못하자 신사는 쪽지를 내보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3년 전에 목사님께서 이 쪽지로 처방을 내린 후, 저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성공하여 큰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처방대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심을 믿고 살았더니 부족함이 없게 해주셨습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늘 건강하고,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부도를 안 당하고, 자동차 사고를 안 당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도 여전히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야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나는 병중에서도, 혼란 속에서도, 사고를 만나고 인생의 풍파 가운데서도 전혀 부족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웟이 만난 그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들이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1. 하나님은 나를 기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입히시고 먹이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자신들이 잘 나서 40년동안 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어른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혼자서 큰 줄 아냐” 이 말씀은 아이들이 성장한 후 자신이 잘 나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오만하게 나올 때 하는 말입니다.

    부모들이 희생이 없었으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을 텐데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잘나서 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굶주리고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서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심리학자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이들이 침대 속에 들어간 후에 각자가 손에 쥐고 있을 빵을 한 조각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손에 들고 있도록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서 평안히 잠들었던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해야만 했던 이 아이들이 내일 염려를 해결 받았을 때 비로소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함을 느끼기 오래 전에 이미 우리의 필요에 대해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급을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묘사했습니다.
왜 양들이 푸른 초장에 누워있습니까? 그것은 양들이 목자가 주는 먹이를 먹고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포만감에 젖어 휴식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케 합니다.

    목자가 양이 무엇이 필요한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 놓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왕궁에 음식과 재물이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들 압살롬이 반역해서 광야에 쫓겨나가 누군가가 음식을 갖다주지 않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쌀 한 톨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그렇구나! 내가 내 목숨을 위해 양식을 공급한 것이 아니구나! 내가 내 가족, 내 부하들을 먹여 살린 것이 아니로구나!" "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습니다. 당신이 나를 지금까지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유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조금만 한눈을 팔면 쉽게 유혹에 빠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대 마다 예언자들을 보내고 사상가들을 보내시고 성현들을 보내서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둔해서 자꾸만 그 길을 외면하고 이탈해서 때로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짐승 중에서도 이 양은 아주 우둔한 동물입니다. 양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양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게 말할 때 양순이지 이 말은 우둔하다는 말이고 미련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은 위험이 닥쳐와도 그 위험을 깨닫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누가 와서 끌어가도 그냥 끄는 대로 끌려간다고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들과 똑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과자 사 준다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좇아갑니다. 양순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을 길들여서 아무나 따라가지 못하도록 훈련해서 내 양을 안전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양은 대부분 자기의 목자의 말 이외에는 따라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4:4절에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목자가 앞서 가면 양은 그 음성을 듣고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느니라”

    그런데 거기에도 예외가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알고 잘 따라가다가도 그 양이 일단 병이 들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아무나 따라 간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위험을 당해서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지한 양의 말로입니다.

    중동을 여행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세 사람의 목동들이 양떼를 거느리고 시냇가에서 물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물을 다 먹인 후에 한 목동이 큰 소리로 “멘아 멘아”하고 부르니까 그의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는 모두 따라 가더라고 합니다. 또 조금 있다가 두 번째 목동이 “멘아 멘아”하니까 그의 양들이 또 따라 가더라고 합니다. 자기의 양떼를 셀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의 양들만 따라 갑니다. 여서 “멘아 멘아” 라는 말은 아랍말로 “나를 따라 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도 신기해서 이 구경꾼이 나머지 한 사람에게 나도 좀 불러 보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옷을 빌려 입고 지팡이를 들고 양들을 향해서 “멘아 멘아” 하고 큰 소리로 불렀더니 한 마리의 양도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3.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양을 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목동의 생활을 해 보았습니다. 양을 치다가 맹수들이 와서 양을 물어 가면 물 맺돌을 들고 좇아가서 맹수들을 물리쳤고 좇아가서 붙잡고 함께 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양을 철저하게 보호하였고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하나님은 마치 그렇게 자기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런데 그렇게 양순하던 양도 어떤 때는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양순하던 양도 매를 자초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의 손에 들린 막대기는 어떤 때는 길을 인도하는 도구가 되지만 또 어떤 때는 양을 때리는 채찍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목자는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위험으로부터 구해야 하기 때문에 지팡이를 때로 매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 본문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 ”누이신다“는 말은 원문을 보면 라바츠(rabat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강제로 눕힌다“(He forces me lie down) 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목자는 때로 양을 인도하되 강제로 눕혀 놓아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는 말은 ”그가 나를 강제로 누이시며” 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강제하실 때가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때론 우리가 불순종할 때 주님은 그의 막대기로 나를 때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순종하시는 성도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다윗은 수많은 고통과 삶의 풍파를 겪은 사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시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찌할 수 없는 풍파, 어찌할 수 없는 질병,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습니까? 그러한 풍파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손에는 막대기를 드시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드시며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우리로 지나가게 하십니다. 이 시간 여호와가 목자되심을 진정으로 고백하십시다.

그리할 때 그분의 채워주심이 있습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그분의 보호하심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탈리아에서 만든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독일의 나찌군이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던 2차대전 말 이탈리아의 한 포로수용소에서 독일군에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던 일가족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유태인 일가족이 독일군 수용소에 끌려갑니다. 수용소에서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고 아빠가 한 5살 정도 된 어린 아들과 함께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수용소의 그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불안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가스실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불안한 수용소 생활에서 어떻게든 아이가 독일군의 눈에 띠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른 채 수용소에 끌려온 아들과 놀이를 합니다. 아이가 숨바꼭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 아버지는 수용소 안에서 아이와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빠와 숨바꼭질 놀이를 합니다. 아이에게는 이런 제안을 합니다.

    “네가 아빠에게 안 잡히도록 잘 숨어 있으면 탱크를 태워주마.”

    아이는 탱크가 타고 싶다는 생각에 열심히 재미있게 숨바꼭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숨바꼭질을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이는 점점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빠는 ‘탱크를 타고 싶지 않느냐’고 아이를 달래서 다시금 아이로 숨바꼭질을 하게 합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불안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가도 아이 앞에 가기만 하면 지금의 상황이 숨바꼭질하는 놀이시간이라고 인식시켜주기 위해서 항상 웃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독일군에게 끌려가서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 아버지가 끌려가 사형을 당할 그 때까지도 숨바꼭질을 하고 있던 아이는 끝까지 숨어 있다가 독일군을 점령하고 들어온 미군에 의해서 발견되어 살아나갑니다.

    그것도 미군 탱크를 타고 수용소에서 빠져나옵니다. 아이는 아빠가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용소에서 구출된 그 아이는 장성해서 어렸을 때를 회상하며 글을 씁니다. 그 때에는 왜 아빠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바꼭질 놀이를 하자고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랑하는 자식을 살리기 위한 아빠의 고통스러운 마음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맨날 숨바꼭질을 하며 어두운 곳에서 숨어 지내야 하는 게 재미없고 불평스러웠지만, 자신을 살리고 죽어간 아빠, 그리고 약속한 대로 탱크를 타게 해 준 아빠의 사랑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입니다. 목자는 때로 양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기 위해서 먼 길을 가게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험난한 길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가시밭길과 같은 아픔의 때를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양에게 더 좋은 꼴을 먹이고 풍부한 물을 마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인 우리는 고난의 길, 험난한 길을 갈 때에는 목자이신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고 ‘왜 우리를 이렇게 험난한 길로 인도하느냐’고 불평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야속하기도 합니다.

    성도여러분, 그러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목자로 모시고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는 행복한 양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경상도 버전의 시편23편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면 재미있으면서도 의미가 있음을 보게됩니다.

   “여호와는 내 목잔기라. /그라이 내사 마 / 답답할게 없데이./
    저 시퍼런 풀 구딩이에 / 내사 마 자빠져 자고 / 셔언-한 또랑가로 / 낼로 잡아 땡기신데이 /
    우짜던지 정신 차리고 / 올케 살아라 카심은 / 다 - 당신 체면 때문이시라 카네. /
    내 디질뻔한 골짜 구디의 껌껌한 데서도 / 그 빽이 참말로 여간 아닌기라.
    주의 몽디이와 짝대기가 / 낼로 맨날 지키시고
    내 라이벌 죽일 놈의 문디 자슥들 앞에서 / 내 대가리에 지름을 바르고
    낼로 팍팍 키와 주시니 / 내사 뭔 걱정이 있겄노 말이다. /
    내 인생이 억수로 복잡타 케싸도 / 저 양반이 맨날 지키줄틴께로 /
    내사 마 우짜든지 / 그 옆에 딱 붙어가 / 때리 지기도 안 떠날끼데이.” /

    여러분, 마지막 절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이 억수로 복잡타 케싸도
    저 양반이 맨날 지키줄틴께로
    내사 마 우짜든지
    그 옆이 딱 붙어가   
    때리 지기도 안 떠날끼데이.”

    성도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복잡하고 힘들다 하더라도 목자 되신 하나님 옆에 딱 붙어 있으면 아무 걱정 없습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때려죽인다고 해도 절대로 목자이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의 인도하심을 따라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에서 행복한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