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요20:19-31

2012. 3. 7. 16:55말씀과삶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요20:19-31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다른 주일과 달리 부활주일은 희망과 소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만나는 사람들 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아이들에게는 달걀을 삶아 전해 주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저는 부활 주일을 맞아 하면서 한편으로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부활절이라는 절기안에만 갚혀 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 따라와야 합니다.
    그를 날마다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부활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귀가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영광을 느끼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못 박히신 그 손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의 손으로 만져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사랑을 속삭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들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고스란히 벤허라는 주인공 인물에게 투영시켰습니다.

    벤허라는 사람은 원래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 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벤허가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치고 변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시간 이 자리에 한 우리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1.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변화 된 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부인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몇몇 여인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는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도마라는 제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난 사람들입니다. 만난 후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시간 이들이 만난 예수님을 나도 만났는가, 그리고 지금도 만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가 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 째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는 슬픔에 빠져 있었던 여인입니다.

    누가복음 23 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그 뒤를 따라간 무리들 가운데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섞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슬퍼하는 여자들의 무리 속에 이 막달라 마리아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보다도 슬픔을 가누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죽었지만 장례만큼은 잘 지내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면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한두 시간밖에 안 남았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또 몇몇 여인네들이 서로 손을 모아 가지고 죽은 예수님의 몸을 씻기고, 향료를 그 몸에 덮고, 베옷을 감고 하는 이런 절차를 다 끝내는 데는 시간 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대강 대강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제대로 하는 사람이면 이틀이나 사흘 걸리는 예식을 한두 시 간 안에 대충 끝내고 무덤 안에 안치해야만 했기에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마리아로서는 그 일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서 이틀 밤을 뜬눈으로 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는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손에는 향유가 들려 있었습니다. 장사 지낼 때 좀 미비했다 싶은 부분을 자기 혼자라도 가서 어떻게 해 보려고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앞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간장이 녹아 내리는 것 같은 슬픔을 눈물로 씻어 내며 울고 있었습니다(11절).

그때 예수님이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랬더니 마리아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당신이 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으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내가 가서 다시 가지고 오겠나이다."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주 듣던 그 음성이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야!"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마리아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을 했을까요?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강 그려볼 수는 있습니다. 슬픔이 가득하던 얼굴이 기쁨으로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던 그 눈에는 기쁨이 충만하여 광채가 났을 것입니다.

    "선생님" 하는 그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마자 마리아의 슬픔은 다 날라 가버렸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중에는 슬픔을 완전히 씻어 버리고 세상을 사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인생 그 자체가 눈물이요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슬픔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도 슬픔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 만 뒤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내속에 있는 슬픔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과 대화속에서 주님의 치료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성도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하는 자를 먼저 잃어버린 슬픔을 안고 있는 자 들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자식을, 형제를, 부모를, 친구를 먼저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5년이 지 나고 10년이 지나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아 지금도 눈물을 짜는 슬픔을 안고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날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가운데

    영의 귀를 열어 놓고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하신다면
그 슬픔과 눈물을 딛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집니다.

    주님은 부활하신후 열 명의 제자들에게 찾아갔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고, 도마는 외출했다가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주님은 열명의 제자들이 있는 곳에 찾아 갔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기를 끌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할 때는 제자들도 우쭐거렸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때는 겁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선생님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감과 용기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군중은 간사합니다. 한때는 그렇게 "호산나"하고 열광 했었지만 예수님이 맥없이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모습을 보자 군중들은 한순간 돌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공포 분위기가 제자들의 주변을 점점 조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도 저렇게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인 우리를 가만 두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말 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살아 계신 주님이 눈앞에서 계시고, 그분이 "샬롬"하시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축 처져있던 어깨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가슴을 가위누르고 있던 공포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용기가 샘솟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유령이 아니다. 내 손을 보라. 내 옆구리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래도 의심하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는 "너희에게 먹을 것이 없느냐? 가지고 와 보라."고 하시고는 제자들 앞에서 잡수기까지 하셨습니다.

    공포속에 살아가든 제자들에게 주님은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사람들이 줄 수 없는 그런 평안이었습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평안함이었습니다.

   어머니품속에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가 갖고 있는 그런 평안함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주변의 환경이 제자들과 같은 공포의 환경이라고 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만나주시기만 하면 공포가 변하여 평안이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욥은 부자입니다. 성공한 사람입니다. 십 남매를 거느리고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동양의 최대 갑부요, 인격자요,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이 형통한 삶을 살 때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워하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던 그것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서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즘 많은 연애인들이 자살 하는 기사들을 봅니다. 왜 그들이 자살을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대앞에서는 환호하는 대중이 있지만 자신의 삶에 돌아왔으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엇가, 그런 공허함이 자신을 힘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나아가 공인이라는 신분이 자신을 더욱 힘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인기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술로, 마약으로 이겨 볼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죽음의 길로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현실이 미래를 바라볼 수 없을 만큼 힘들다고 할지라도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어린아이가 이제 막 일어나서 걸으려고 하면 수없이 넘어집니다.

    넘어져서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두손이 늘 그를 붙들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만 바라보고 나아 갈때에 끝내 그 아이는 부모의 도움없이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을 보십시오.

    "나는 부활이요 생명 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부활의 주님은 병의 공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십니다.

    '어떻게 살까, 앞날이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보십시오.
    "세상 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통도 당할 수 있고, 실패 할 수 도 있고, 핍박당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공포에 짓눌려 고생할 때도 있을 것이다.'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그 모든 상황에도 담대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인간의 슬픔을 완전히 발로 밟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날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사람이 된 이상,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좌절당할 수 없습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집니다.

    열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무슨 일로 나갔는지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못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고 떠들어댔습니다.

    도마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하필 내가 없을 때 찾아오셨지? 왜 나만 빼놓고 예수님이 찾아오시단 말이야.'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그런 황홀한 순간에 빠져 있었다는 그것 때문에 약간의 거부 반응이 생겼을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자신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도마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 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집어넣어 보아야만 믿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이 세상에서 공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600여명 의 사람들에게만 보이시고 그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직접보지 못했지만 믿습니다.
    주님을 직접보지는 못했지만 말씀과 기도와 삶속에서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사람은 만사를 자기 잣대를 가지고 재어보고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절대 믿을 수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아직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자기도 모르게 자꾸 회의적인 생각 때문에 끌려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도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8절).

    예수님은 도마보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이 말씀을 들은 도마는 그때부터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은 수십 년 후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 다가 순교하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성도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회의적인 사람일수록 이 예수님을 만나셔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두려움속에서 살아갑니다. 슬픔속에 살아갑니다. 의심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슬픔이 변화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속에서 갚혀 있는 사람이 비젼을 가져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이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능력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